유다의 전사 마카비우스
'마카비우스'는 유대의 영웅 유다 밴 마타티아스의 별명의 헬라어형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망치로 금속 등을 두드려서 만드는 자'를 의미하며 랍비 문언에서 그의 가족은 하스몬가로 불리고 있다.
알랙산드리아의 헬라 제국 분열 이후에. 시리아 진영(셀레우쿠스 왕가)과 이집트 진영(톨레미 왕가) 사이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셀레우쿠스왕 안티오쿠스 4세 (에티파네스)가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유대의 제사장직을 경매에 부쳐 최고의 입찰자인 메네라우스에게 팔았으며. BC 168년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강한 종교적인 박해를 시작했고 성전에 상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우스는 겔릴라 군을 이끌고 숫적으로 월등히 많은 수리아군에 대항하여 승리하였으며 그 결과 안티오쿠스의 섭정인 리키아 스는 그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어 예루살렘에서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 즉 제우스 신상을 제거하였으며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상이 들어선 이후 3년 반 만인 기원전 164년 기슬레브월 제25일에 성전을 정화하고 희생 제사를 부활시켰다. (마카비상 4:36-58) (단7:25)계시록12:6)
그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그는 대제사장 마넬라우스를 제거하고 사독 계열의 헬라주의자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전통적인 예루살렘 성전 제의를 복원시켰으나 유다 마카비는 헬라화에 동정적인 대제사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 리시아스는 섭정관이 되어 유다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하여 베사가리야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왕위를 노리던 리시아스의 정적 필립이 페르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공격해 오자 리시아스는 급히 철군을 하고 말았다.
알키모스와 바키데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유다 마카비는 알키모스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나갔다. 결국 왕은 니카노르 장군을 사령관으로 세웠다.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온 니카노르 장군은 사정없이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벧 호론 전투에서 전사하자 유대인들은 이 날을 니카노르의 날로 경축하였다.
반란군의 기세를 꺾은 바키데스는 게릴라 운동의 싹을 잘라 버리려 하였으나 유다 마카비의 후계자인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은 유대 광야로 도망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그는 용맹한 군인이었던 형 유다와는 달리 비상한 외교술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몇 년간 평화스러운 기간을 보냈다. 요나단은 데메트리우스 1세보다는 더 큰 정치적 야망을 가진 안티쿠초스 4세의 아들로 자처한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충성하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기를 원했다.
결국 왕을 물리친 알렉산더 발라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6세의 딸과 결혼하고 (단 2:43-44) 결혼식에 요나단을 초대하여 '왕의 친구'라 불렀다. 또 그는 일부 유대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에게 자색 옷을 입혀 시가행진을 하도록 하였으며 요나단을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함으로 어느 정도 독립의 기틀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