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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정보

부자와 거지 나사로(눅16:19~31)

by 모든 정보 나눔 2020. 5. 17.

부자와 거지 나사로(눅16:19~31)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매일 그는 친구들을 불러서  함께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기쁨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날마다  그 부자의 상에서  먹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이렇게 평생을  보내다가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거지 나사로는 분명히 천사의 손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자는 땅에 묻혔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는 비천하고 거지로 살았지만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보면 비록 가진 것이 없고 어렵고 병들고  믿지 않는 자들처럼 누리고 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생명이 끝나면 우리가 갈 곳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신 그곳에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삶은  그렇지 않다.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혔다고 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분명히 지옥과 천국이 존재함을 보여 주시기 위한 비유였다.

 

완전히 모든 것은 다르게 나타났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히 이 부자도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는 이는 이방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처지에서  하나는 거지로 살았고 하나는 부자로 살았다.  이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지금으로 말하면  같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볼수 있다.

 

지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났던지.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을 했던지 이유는 다르지만  부유함과 초라한 삶을 사는 것은 똑 같은 이치라고 본다.

부자는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이것은 지금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부귀와 명예 또는 호화로운 삶이 천국에서는 결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나사로가 두 사람 나온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예수님이  부활시킨 나사로가 있다. 다른 나사로는 지금 이 비유에만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이름을 거명한 유일한 인물이다.

호화롭게 사는 어느 부자의 집 대문 밖에 나사로라는 가난한 거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똑 같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제는 육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영적인 문제만이 그곳에서는 누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역전되어 부자는 지옥에 있고 나사로는 천국, 즉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다.

 

예전에는 (천국에 가면 옛날의 위대한 족장들을 만난다고 여겼다). 부자는 지옥의 불 속에서 고통을 겪다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 자기 혀에 묻혀달라고 애걸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의문점을 갖게 되는 것이 있다. 나는 요즘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에서 모순이라고 하면 안 되지만.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부모를 천국에서 만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살이 그대로 연관 지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을 하다 보면 이 대목에서 걸림이 된다. 여기 기록된 대로  가장해서 아버지는 지옥에 갔다. 아들은 천국에 갔다. 

아브라함은 나사로에게 부자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받은 반면 나사로는 고난을 받다가 이제 여기서 위안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자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가족에게 보내 장차 지옥에 가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인도를 받으면 될 것이라고 한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을 믿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부활을 염두에 둔 말이다.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이런 비유로 가르침을 전하였다.

나사로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현세에서 풍족하게 산 사람들보다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 가르침을 극적으로 표현한 예수의 말씀 중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누가 머라고 하든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우리의 육신의 모든 삶과 인연은 세상에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끝나고 저 천국에 올라가면 육신의 모든 친 인척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아버지고 예수님이 신랑이라고 하였으니 다 똑같은 입장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하셨듯이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삶을 누리리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거기에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다 변화된 모습으로 그저 새롭게 만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우리 신랑이라고 부르면서 영원히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