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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정보

희망의 에셀 나무, (창21:33~34)

by 모든 정보 나눔 2020. 4. 30.

희망의 에셀 나무. (창 21:33~34)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삭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분부하신 대로, 그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보았을 때에,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사라가 혼자서 말하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엄두를 내었으랴? 그러나 내가 지금,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주어라.

 

다음날 아침에 일찍, 아브라함은 먹을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었다. 그는 먹을거리와 마실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서,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다. 하갈은, 길을 나서서,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바란 광야에서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집트 땅에 사는 여인을 데려가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무렵에 아비멜렉과 그의 군사령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대를 도우십니다.

 

이제 여기 하나님 앞에서, 그대가 나와 나의 아이들과 나의 자손을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그대가 나그네살이를 하는 우리 땅에서, 내가 그대에게 한 것처럼, 그대도 나와 이 땅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맹세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빼앗은 것을 아비멜렉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대도 그런 말을 여태까지 나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일을 겨우 오늘에 와서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끌고 와서,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웠다. 아브라함이 양 떼에서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 놓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내가 이 우물을 파 놓은 증거로, 이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여기에서 이렇게 맹세를 하였으므로, 그곳을브엘세바라고 한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운 다음에, 아비멜렉과 그의 군사령관 비골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가 21장 본문에서 본 내용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를 심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영생하시는 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블레셋 족속의 땅에 머물러 있었다. (창 21:33~34) 아브라함은 왜 나무를 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까?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자신은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그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며 진짜 모든 것의 끝은 희망을 놓아 버리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3년 동안 다카우와 다른 강제수용소가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냈다. 그는 그곳에 수용돼 있으면서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살펴본 결과 다른 모든 고통과 굶주림  영양실조  이런 모든 것은 다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날에 대한 희망을 놓는 순간 그곳에 수용돼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씩 죽어 갔다고 한다. 즉 양식이 없으면 사십일 이상 살 수 없고 물이 없으면 칠일을 버티기 어렵다. 공기가 없으면 1분 이상 버틸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죽인 것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었다고 한다. 

 

아브라함도 이제 이 나무를 심으면서 다시 새로운 삶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의 의지로 낳은 이스마엘이 떠나가고 언약의 아들 이삭으로 세워지면서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네 이름을 창대한 이름이 되게 해 줄 것이며,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라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따라 길을 떠났다. 하지만 175세가 된 아브라함이 죽게 됐을 때 자식은 고작 둘이었다. 다른 씨를 통해 낳은 자식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이것만 보면 약속은 깨진 셈이다.

창세기 22장에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아들마저 제물을 삶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하였다. 결국 하나님이 제지하셔서 이삭을 살려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이 보이는 땅을 다 주겠다고도 하셨다. 아브라함은 큰 비용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산 게 전부였다. 그곳에 아내 사라를 매장한 뒤 훗날 자신도 묻혔다. 동서남북은커녕 어둡고 좁은 동굴 하나밖에 얻지 못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대한 이름을 주겠다고도 하셨지만 그는 무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을 뿐이었다. 그 나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희망의 나무였다.

 

지금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가장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무엇을 하면, 무엇을 드리면,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고 한다. 

 

심지어 부흥회를 하면서 어떤 강사는 마치 하나님의 응답이 물질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므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부흥강사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가 마치 하나님의 응답인 것 같이 몰려든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다 그분이 주신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받을 상처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응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응답의 시간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있다. 아브람도 그의 생전에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 모든 응답은 이루어진 것이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도 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에서야 그렇게 불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육적인 물질이나 세상으로부터 오는 많은 부귀와 장수 가진 자들이 되어야만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을 구별하고 잘 설명하여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을 비례하여 설명해 주고 믿음을 지키게 했다면 지금 오히려 혼돈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각성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가르쳤으면 좋겠다. 그래야 축복이 아닌 환난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것은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더 힘이 든다. 마치 이런 상황이 이루어지면 마치 믿음 생활을 잘못하여 벌을 받은 것처럼 인식하며 바라보는 것 때문에 더 힘이 든다.

 

잠시 코로나 때문에 교회를 쉬면서 이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안다. 그러나 참 마음은 평안하다. 집에서 말씀을 보면서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어쩌면 나 혼자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이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