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정보

엘리사의 기적(왕하19~25)

by 모든 정보 나눔 2020. 4. 10.

엘리사의 기적(왕하19~25) 


엘리사의 기적(왕하19~25) 

엘리사의 기적(왕하 2:19~25) 

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갔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가 던져준 겉옷으로 엘리야가 한 그대로 옷을 말아서 요단 강물을 쳤다.

 

엘리야가 하던 것과  같이 요단 강물이 이리저리 갈라져서 강을 건너왔다. 그가 돌아오니 모든 생도들이 그를 보고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의 머리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여기서 본문을 통해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 하고 같은 일을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사람은 따로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끝까지 성실하게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모든 회사도 그렇다 사람이 보기에는 아첨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할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직도 성실하게 자기의 일에 충실하게 하므로 오노의 눈에 들어서  중직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이제 엘리사의 시대가 왔다.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가장 많이 보여준 예언자다.

 

그 첫번째 기적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적이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성읍에서 지도자로 쓰임을 받는다.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께서도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좋지만, 물이 좋지 않아서,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유산합니다."


그러자 그는 새 대접에 소금을 조금 담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니,  엘리사는 물의 근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소금을 그곳에 뿌리며 말하였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맑게 고쳐 놓았으니, 다시는 이 곳에서 사람들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사역을 보는 듯하다. 


 

엘리사의 기적 두번째.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그곳의  물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그때부터 맑아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엘리사가 그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가려고 길을 떠났다. 

 

그가 베델로 올라가는 길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보고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고 놀려 대었다. 성경에 아이들이라 함은 철 모르는 아이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다 자라 판단이 분명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악과 선을 이해할 줄 청년들을 말한다. 당시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 (창 41:12)

 

이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다가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은 지나친 보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저들의 조롱은 곧 하나님을 대적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의 죽음은 당연한 심판의 결과였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조롱하고 놀려 대며 따라오는 아이들을 엘리사는 돌아서서 그들을 보고, 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곧 두 마리의 곰이 숲에서 나와서, 마흔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였다.

 

엘리사는 그곳을 떠나 갈멜 산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지금도 요즘 젊은이들이 건전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이들도 있지만 때로는 안하무인적인 아이들도 있다. 

 

거리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볼 때도 있는데 지금은 그 아이 들을 나무라지 못한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세대가 변하여졌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채벌을 할 수 없다. 채벌을 한 선생님은 아이들이 동영상을 찍어 올리고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선생님을 때리지 않나,

 

교육청에 고발하여 채벌을 가한 선생님은 교단에 설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의 잘못은 우리 기성세대가 만드러 놓은 산물이다. 각성하고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도 채벌을 무서워하는 자는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매는 그 아이의 가는 길을 올바르데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